![여천NCC 제2사업장 전경. [출처=여천NCC]](https://cdn.ebn.co.kr/news/photo/202508/1674210_690463_5048.jpg)
한국 제조업의 핵심 축인 석유화학 산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국내 설비 과잉에 중국산 저가 공세, 중동의 전략적 투자까지 겹치며 생존 기반이 흔들린다. 여천NCC의 디폴트(채무불이행) 우려, 전국 산업단지의 셧다운 확산은 더 이상 이 위기가 특정 기업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은 탄핵 정국과 정권 교체의 혼란 속에 8개월째 표류 중이다. 산업 구조조정과 미래 전략 전환이 늦어지면, ‘K-석유화학’은 글로벌 무대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본지는 3회에 걸쳐 위기의 현주소와 구조적 원인, 그리고 해법을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국내 대표 국가산단인 여수국가산업단지 내 여천NCC가 부도 위기를 모면했지만 산업 전반에 대한 위기감은 계속해서 확산하고 있다. 수년간 이어진 업황 침체로 기업들의 경영 환경이 급속도로 악화한 상황에서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대외 불확실성마저 고조되면서 '셧다운 도미노'와 '채용 중단'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12일 석유화학 업계에 따르면 여천NCC의 지분을 절반씩 보유한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은 추가 지원과 관련해 갈등을 빚고 있다. 전날 DL케미칼은 여천NCC에 대한 추가 자금 지원과 관련해 긴급 이사회를 열고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안건을 통과시켰다. DL케미칼이 2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하고, DL이 DL케미칼 주식 82만3086주를 약 1778억원에 매입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여천NCC 공동 대주주인 한화와 DL이 극하게 대립했다.
앞서 여천NCC는 석유화학 불황에 따른 적자와 재무구조 악화로 3100억원 규모의 자금 부족 문제에 직면했다. 회사채 발행과 대출마저 어려워지면서 디폴트(채무불이행) 직전까지 내몰리자 추가 지원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DL그룹이 자금 지원을 결정, 부도 위기라는 급한 불을 끄게 됐다.
여천NCC의 긴급 수혈로 부도 위기는 넘겼지만 업계에서는 업계 3위(에틸렌 생산능력 기준)인 여천NCC가 부도 위기에 몰렸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이 수년간 적자를 쌓아온 상황에서 제2, 제3의 여천NCC 사태가 잇따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전국 3대 석유화학단지에 입주한 나프타분해시설(NCC) 설비 10곳 중 상당수가 경영난에 직면한 상태다.
LG화학은 대산·여수 공장의 석유화학 원료 스티렌모노머(SM) 생산 라인 가동을 비롯해 나주 공장 알코올 생산을 멈췄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12월 대산 2공장 내 5개 생산라인 중 에틸렌글리콜(EG) 2공장을 비웠다. 여수산단 내 2공장의 일부 생산라인도 가동을 중단했다. 현재 롯데케미칼은 HD현대오일뱅크와 함께 대산석유화학단지 내 NCC 설비를 통합 운영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유진투자증권은 여천NCC 사태 이후 "내년부터 시행될 4차 배출권거래제에서 석유화학 업종이 유상할당 업종으로 포함될 경우 이번 사태는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며 "석유화학 업체들의 좌초자산은 더 많이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 산넘어 산…내년 중동발 샤힌프로젝트 가동 예정
세계 최대 석유기업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자회사인 에쓰오일(S-OIL)이 9조원이 넘는 거액을 투입해 추진하는 '샤힌프로젝트'도 위협요소다. 샤힌 프로젝트는 원유 증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정유·석유화학 통합공정(COTC) 방법 중 열분해 방식인 T2C2를 채택했다.
T2C2 방식이 적용되면 나프타 분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에틸렌과 프로필렌 생산이 가능하다. 기존 NCC를 통해 생산하는 에틸렌 가격 대비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 샤힌프로젝트 완공 시 국내 NCC의 경쟁력이 악화될 것이란 우려가 확산하는 이유다.
샤힌프로젝트는 내년 상반기 중 기계적 완공, 하반기 내 시운전 후 상업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공급과잉 문제는 그나마 국내 기업들이 적응하고 대응해왔던 부분"이라며 "반면 에쓰오일의 샤힌 프로젝트로 인한 중동발 공급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사례로 여파가 훨씬 클 것"이라고 말했다.
![울산시 울주군 온산국가산업단지 내 에쓰오일 샤힌 프로젝트 공사 현장. [출처=에쓰오일]](https://cdn.ebn.co.kr/news/photo/202508/1674210_690462_4833.png)
업계를 둘러싼 불안감은 채용 시장으로도 고스란히 옮겨가고 있다. 중견기업 '한국엔지니어링플라스틱(KEP)'은 지난달 울산공장 생산공정운전원 채용을 중단하고 이를 지원자들에게 통보했다.
한국엔지니어링플라스틱은 1987년 설립한 국내 최초의 폴리옥시메틸렌(POM) 생산 업체다. 글로벌 POM 제조사로서 연간 생산능력은 약 14만5000톤 규모에 달한다.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약 12% 수준인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 본사를 중심으로 울산과 평택, 중국 난퉁 등에 생산 시설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엔지니어링플라스틱은 채용 취소 직후 응시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회사 내부사정으로 인해 해당 채용 절차를 부득이하게 취소하게 됐다"며 "지원자 분들의 소중한 시간과 노력을 알기에 이와 같은 안내를 드리게 되어 매우 송구스럽다"고 밝혔다.
석유화학 업계 다른 관계자는 "현재 울산 단지에서는 에쓰오일 샤힌프로젝트를 제외하고 신공장 건설은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라며 "이는 석유화학 업체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한편 산업 재편 컨설팅을 맡고 있는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지난달 초 국회에서 열린 포럼에서 현재의 불황이 지속될 경우 3년 뒤에는 기업의 50%가 문을 닫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김지훈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대표파트너는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경쟁력은 더 이상 과거처럼 '버티기'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며 "산단별 맞춤형 구조조정과 정부의 규제·재정·에너지 지원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