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시 남구 석유화학공단 롯데케미칼 울산1공장의 모습. [출처=연합]
 울산광역시 남구 석유화학공단 롯데케미칼 울산1공장의 모습. [출처=연합]

한국 제조업의 핵심 축인 석유화학 산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국내 설비 과잉에 중국산 저가 공세, 중동의 전략적 투자까지 겹치며 생존 기반이 흔들린다. 여천NCC의 디폴트(채무불이행) 우려, 전국 산업단지의 셧다운 확산은 더 이상 이 위기가 특정 기업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은 탄핵 정국과 정권 교체의 혼란 속에 8개월째 표류 중이다. 산업 구조조정과 미래 전략 전환이 늦어지면, 'K-석유화학'은 글로벌 무대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본지는 3회에 걸쳐 위기의 현주소와 구조적 원인, 그리고 해법을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한국 석유화학 산업이 벼랑 끝에 섰다. 과거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이끌던 핵심 기간산업이 이제는 일시적 불황을 넘어 영구적일 수 있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중국의 공격적인 자급자족 전략과 중동의 압도적인 원가 경쟁력이라는 파도에 껴 한국 기업들은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전문가들은 과거의 성공 방식을 버리고 고부가가치 첨단 소재로 사업구조를 재편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공급 과잉에 범용 제품 직격탄

글로벌 공급과잉 현상은 기업들의 재무제표에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13일 석유화학 업계에 따르면 LG화학 석유화학 부문은 2025년 2분기 90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적자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 2025년 상반기에만 기초화학 부문에서 3294억원의 막대한 영업손실을 내며 적자 기조가 계속되고 있다. 금호석유화학과 한화솔루션 등 다른 주요 기업들의 케미칼 부문 역시 수익성이 하락했다.

위기의 본질은 범용 석유화학 사업 모델의 붕괴다. 실제 기업 실적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대규모 손실은 대부분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과 같은 범용 제품(기초소재)군에서 발생하고 있다. 반면 반도체 소재나 친환경 소재 등 고부가가치 '첨단소재' 부문은 흑자를 유지하며 위기 속에서도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중국과 중동 국가들이 진입장벽이 낮은 범용 제품의 공급을 대폭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대 고객에서 최강의 경쟁자로, '중국의 역습'

이번 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중국의 변모다. 한국 석유화학 제품의 최대 수출 시장이었던 중국은 이제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가 됐다.

중국은 국가 주도하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어 석유화학 설비를 증설했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전 세계 에틸렌 신규 증설 물량의 64%를 중국이 차지했으며, 이미 생산 능력에서 미국을 넘어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이로 인해 과거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이었던 폴리프로필렌(PP) 등은 중국 내 자급률이 100%에 이르며 한국산 제품이 설 자리를 잃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국 수요를 넘어선 중국의 막대한 생산 물량은 이제 저가 공세 형태로 글로벌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른바 '밀어내기 수출'이다. 중국은 원유를 직접 화학제품으로 전환하는 정유·석유화학 통합 공장(COTC)과 저가의 러시아산 원유를 활용해 한국의 전통적인 나프타분해설비(NCC)가 따라갈 수 없는 원가 경쟁력까지 갖췄다. 이는 한국 기업들의 수익성을 근본적으로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COTC는 말 그대로 원유에서 곧바로 화학제품을 뽑는 공정 방식이다. 기존 정제 공정에서 100의 원유를 투입했을 때 10의 화학제품이 나온다면, COTC 공정에서는 40 정도가 나온다.

[출처= ]
원유를 정제하면 휘발유, 경유 등 석유제품과 함께 석유화학 제품의 원료가 되는 납사(나프타)가 나온다. 납사를 가공하면 에틸렌, 프로필렌 등 석유화학의 기본이 되는 제품이 나오고, 여기서 파생된 다양한 화학제품이 화학산업을 이룬다. [출처=LG화학]

■압도적 원가 우위, '사막의 야망'

글로벌 공급 과잉의 또 다른 축은 중동 산유국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은 장기적인 원유 수요 감소에 대비해 석유화학을 국가의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고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고 있다.

중동 석유화학 산업은 원유를 직접 생산하는 특성상 원가 경쟁력 측면에서 유리하다. 한국과 중국과 달리 수입 과정에 필요한 물류비와 각종 세금을 아낄 수 있다는 점도 중동 국가의 이점이다.

특히 중동 국가들은 COTC 생산시설에 집중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오만 등 중동 국가에서 8개가 진행되고 있다. 에틸렌 생산 기준 1123만톤 규모에 달한다. 이는 한국의 에틸렌 생산 규모(2021년 기준, 1270만톤)에 맞먹는 수준이다.

■과거와의 결별,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

업계는 현재의 위기는 일시적 경기 순환이 아닌 영구적인 패러다임 전환으로 본다. 중국발 공급 과잉과 중동의 저가 공세라는 현실 속에서 과거와 같은 호황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경쟁력을 상실한 노후 범용설비(NCC)를 통폐합하는 과감한 산업 구조조정과 배터리, 바이오, 반도체 등 첨단 소재 분야로의 신속한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단순히 제품을 대량 생산해 수출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과거의 성공 방정식을 버리고, 첨단 소재 등 새로운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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