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천NCC 제1 사업장 [출처=여천NCC ]
여천NCC 제1 사업장 [출처=여천NCC ]

중국발(發) 공급 과잉으로 국내 석유화학 산업이 압박을 받는 가운데, 정부는 기초 석유화학 시설(에틸렌 기준) 최대 25% 감축을 목표로 구조조정을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LG화학·롯데케미칼·HD현대케미칼·대한유화 등 기업들은 구조개편 논의를 진행 중임에도 맞춤형 지원 부재, 고용·지역경제 영향, 인력 부담 등으로 실제 실행 단계에선 뚜렷한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17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국내 10개 주요 석유화학 기업은 정부 방침에 따라 연간 270만~370만톤 규모의 에틸렌 생산을 줄이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각 사는 같은 산업단지 내 경쟁 업체와 시설 통합 등을 포함한 자율 구조조정 계획을 협의하고 있다. 연내 산업통상자원부에 구체적 구조조정 방안을 제출할 예정이며, 정부는 제출안을 검토한 뒤, 세제와 금융 지원을 차등적으로 제공할 방침이다.

하지만 다양한 NCC 감축안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진 구체적 합의나 실행 계획은 없는 상태로 전해진다.

석유화학 업체들의 구조조정 일환의 첫 번째 사례로는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의 대산공장 통폐합이 꼽힌다. 

1992년부터 상업가동 시작한 롯데케미칼(115만톤)의 노후 에틸렌 생산 설비를 양사 합작사인 HD현대케미칼에 넘긴 후 이는 폐쇄하고, 2021년 가동한 HD현대케미칼(85만톤) 설비만 계속 운영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HD현대오일뱅크가 현금 혹은 현물출자를 통해 HD현대케미칼 지분 10% 추가 매입, 현재 60:40 지분율을 50:50으로 조정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양측이 가격에 대한 이견 차이를 보이면서 후속 과정이 진행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 NCC 통폐합 논의도 구체적 진전 없어

LG화학과 정유사인 GS칼텍스는 여수NCC(나프타분해시설) 통·폐합 논의를 진행중이다. LG화학이 여수NCC 공장을 GS칼텍스에 매각한 뒤 합작회사를 설립해 NCC를 통합 운영하는 것을 제안·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롯데케미칼도 수직 계열화 파트너로 GS칼텍스를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 진전이 확인된 바는 없다.

GS칼텍스는 정유사업이 중심인 만큼 석화사와의 통합 논의에 있어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속도감 있는 협상을 벌이기 보다 시간을 두고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방침으로 풀이된다.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 간 통합도 뚜렷한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부터 정유사인 SK에너지에서 나프타를 공급받는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가 NCC를 통합함으로써 수직 계열화를 이룬다는 구상이다. SK측이 흡수합병과 설비 통합 운용 등을 제안했지만, 대한유화가 자금 문제를 이유로 SK지오센트릭 인수에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진다.

국내 2, 3위 에틸렌 생산 업체인 롯데케미칼과 여천NCC의 통합 가능성도 거론된다. 여수에서 롯데케미칼은 연간 123만톤, 여천NCC는 연간 228만톤의 에틸렌을 생산 중이다. 다만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여천NCC 지분을 절반씩 보유한 점을 고려할때 이해관계자가 많은 지배 구조가 걸림될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일각에서는 자율협약에 따른 구조개편 효과가 큰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2023년 이후 석유화학 매각을 타진하는 기업들이 늘어났으나 매각 가치에 대한 매수·매도업체 간 이견으로 거래 성사된 사례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번 자율협약에서의 공급감축에 앞서 산업단지별 설비 통합 논의가 진행 중인데 향후 폐쇄까지 단행해야 할 설비에 대한 가치평가에 대한 이견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부의 구조조정 압박으로 기업들의 셈법이 복잡해지면서 자칫 상호 간 불신을 자극하고 더 큰 위기를 초래하는 '죄수의 딜레마'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번 구조개편의 경우 정부가 NCC 감축 할당량을 직접 정해주지 않고 기업들의 자율적인 협약에 따라 이뤄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신한투자증권은 "(이번 구조조정은) 적절한 보상과 지원이 없다면 협약을 이탈할 유인이 존재한다"며 "기업들도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감축에 적극적이지 않다면 구조조정 성공을 장담할 수 없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출처=롯데케미칼]
[출처=롯데케미칼]

■"석유화학 구조조정 압박…노조·고용도 걸림돌"

이와 관련 산업통상자원부는 다음달 중 기업들과의 미팅을 기반으로 한 구조조정 관련 큰 틀의 협력 방향을 발표할 계획이다. 다만 일부 기업들은 정부의 정확한 가이드라인과 지원책이 명확히 공개되지 않아 불확실성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정부는 고용과 지역경제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구조조정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하면서, 기업들의 자율적 재편 추진을 사실상 제약하고 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여기에 '노란봉투법' 발효가 맞물린 상황의 인력 구조조정에도 여파가 예상된다. 노란봉투법은 노동조합 활동과 근로자 권리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기업이 정리해고나 인력 감축을 추진할 경우 법적 분쟁 위험이 크게 높아질 수 있어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설비 폐쇄나 생산 효율화 수준의 구조조정은 허용하되, 인력 감축과 관련해서는 고용 안정과 지역 경제 보호를 전제로 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 정책을 운영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평중 한국화학산업협회 총괄본부장은 "대기업은 노조의 힘이 강해 현실적으로 인력 구조조정이 쉽지 않은 게 사실"이라면서도 "다만 지금 시점에서 가장 급한 것은 협력 상대를 누구로 정할지 결정하는 문제이고, 인력 조정이나 고용 문제는 그 이후 과제로 다뤄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실질적인 구조조정과 고부가 중심 사업 전환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감안할 때 보다 직접적이고 과감한 제도 설계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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